노동판례 | 갱신기대권 차단 위해 몰래 녹음한 사용자, 합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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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1-17 09:57 조회24회 댓글0건본문
직장 내 갈등이나 징계 절차에 자주 등장하는 증거가 있다. 바로 ‘녹음파일’이다. 회의나 면담 자리에서 상대방의 발언을 몰래 녹음한 뒤 이를 폭언이나 부당해고의 증거로 제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하지만 대화 당사자가 직접 녹음했다고 해서 언제나 합법은 아니다. 만약 사용자가 법적 분쟁에 대비해 근로계약 종료를 통보하는 면담내용을 노동자 몰래 녹음했다면, 적법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음성권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이지만…”
10월16일 대법원 제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부산의 한 금융투자회사 노동자가 자신의 음성을 허락 없이 녹음한 것은 ‘음성권 침해’라며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사용자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음성권이 헌법 10조가 보장하는 인격권의 한 형태라고 전제했다. 누구나 자신의 음성이 본인 의사에 반해 함부로 녹음·재생·배포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생활 과정에서 ‘진실보존’이나 ‘자기방어’를 위한 녹음까지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봤다. ‘녹음’이 곧 ‘불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판례에 따르면 녹음행위가 음성권 침해로 인정되려면 방법의 부당성과 피해의 중대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명시적으로 녹음을 거부했는데도 몰래 녹음했거나 △협박이나 기망을 동원해 녹음을 강행한 경우 △녹음파일을 제3자에게 유포하거나 언론·SNS 등에 공개한 경우에는 ‘음성권 침해’로서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할 수 있다.
법원, 음성권과 증거 확보 사이 경계선 제시
이번 사건은 2022년 8월 A금융투자회사가 부산 영업소 폐쇄를 예정하면서 관련 직원 B씨에게 계약 만료 사실을 통보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 자리에 있던 본사 마케팅부서장이 B씨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대화 전 과정을 녹음했다. B씨는 2020년 9월 계약직으로 채용돼 여러 차례 근로계약을 갱신했는데 뒤늦게 녹음 사실을 알고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사측은 “녹음은 근로계약 종료 통보 사실을 명확히 남기기 위한 조치였으며, 갱신기대권과 관련한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A사는 영업소 폐점에 관해 B씨의 반응을 확인하고, 근로계약 갱신을 기대하는지 여부를 명확히 해 분쟁을 예방할 필요가 있었다”고 봤다. 법원은 “(녹음된) 대화 내용은 근로계약 종료를 통지하면서 갱신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리는 취지에 불과하고, 개인의 내밀한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B씨가 입을 피해 정도가 크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녹음파일과 녹취록이 법적 분쟁과 관련해 노동위원회나 법원에 제출하는 방식으로만 사용됐을 뿐”이라며 “이러한 증거 제출로 인해 B씨가 입을 수 있는 피해는 사회통념상 수인할 수 있는 정도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은 사용자가 노동자와의 대화를 녹음한 행위의 정당성 여부가 쟁점이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분쟁 예방이나 법적 절차에서의 증거 제출을 위해 녹음한 경우라면, 그 행위는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수인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고 봤다. 녹음의 주체가 누구냐보다 녹음의 목적과 방법이 합리적이었는지가 위법성 판단의 기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